이 주말 잡담 작은제목에서 보셨듯이, 시차의 고통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느낀 그랑프리였습니다. 워낙에도 한국 거주자 입장에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펼쳐지는 레이스는 그게 북쪽이든 남쪽이든 무관하게 괴로운데요 - 그 동네서 적절한 오후 시간대면 여기는 한밤중 내지는 다음날 새벽이니까 - 이번에도 역시나... 몬트리올이 (Covid 여파로)빠졌다 해도 텍사스 오스틴, 멕시코 멕시코시티, 브라질 상파울루(인터라고스) 이 셋은 어쩔 수 없지요. 특히나 올해처럼 챔피언십 경쟁 치열한 마당의 시즌 막판은 더더욱 챙겨 보게 되는 ... 그렇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통. -_-;
오스틴 서킷 오브 디 아메리카(이하 CotA)는 턴1 올라가는 오르막이 인상적이죠. 다른 유명 서킷에서 명불허전 소리 듣는 구간들을 잘 조합한 것 같은 ^^; 서킷이기도 해요. DRS 존은 두 곳, 메인 스트레이트와 턴11-12 사이 긴 직선 구간. 앞서 열렸던 두바퀴 쪽 MotoGP에서 노면 울퉁불퉁하단 이야기 꽤 나왔다고 들었는데, F1 하기 전에 손 좀 보았다는 것 같았는데도 여전히 꽤나 까다로웠던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중계 보니까 한 해 쉬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 꽉꽉 들어차 있더라고요. 마스크 쓴 사람 좀처럼 안 보여서 미국은 역병 시국 끝난 줄 알았습니다.
연습주행 첫 세션에서는 메르세데스가 강세를 보였어요. 해밀튼 트랙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가 나올 만큼 루이스 해밀튼의 CotA 성적은 준수한데요, 올 시즌엔 워낙 레드불 레이싱이 차량 성능부터 앞서나가고 막스 베르스타펜도 거의 실수 없이 레이스 운영을 잘 해 나간 상황이라 연습주행 페이스만으로는 토요일 일요일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웠지요. 연습주행 첫번째 세션은 거의 시작하자마자 벌어진 레드 플랙 - 턴12에서 멈춰선 알핀의 페르난도 알론소 - 외에는 이렇다 할 사건사고 없이 마무리. 알론소도 FP1 종료 15분쯤 남기고서는 다시 트랙으로 나왔으니 알핀 대단하지요. 금요일 오전에는 페라리들이 미디움 타이어를 좀 써 봤고 아스톤 마틴에서 스트롤이 의외로 하드를 조금. 상위권(?)은 소프트 몰빵 분위기인 것도 재밌습니다. 리더보드 아랫쪽 단골들은 오히려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편이었고요.
FP2에선 한창 챔피언십 경쟁 과열 상태인 걸 반영이라도 하듯 초반부터 꽤 재미있는 신경전이 펼쳐졌지요. 휠투휠 싸움에 이은 가운뎃손가락 올리기라든지 트래픽 불평이라든지. 그래도 무난하게 세션 마무리되나 했더니 알핀의 알론소가 턴19 그래블에 빠지면서 배리어에 리어를 날릴 뻔 합니다. 그래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마무리된 편. FP2, FP3에선 다시 RBR 쪽이 우세했는데 그 와중에 맥라렌-페라리 경쟁도 나름 치열하고... 알파타우리의 피에르 가슬리는 요즘 정말 청년가장 모드로군요. 혼자 지고 달리는 느낌.
한편 메르세데스에서는 발테리 보타스 차에 새 ICE를 얹으면서 금요일부터 5그리드 페널티를 확정합니다. 파워유닛 관련으로 페널티 확정된 다른 드라이버들로는 아스톤 마틴의 제바스티안 베텔, 륄리엄스의 조지 러셀도 있다보니 메르세데스 계열 PU 쓰는 팀들 살짝 걱정할 만도 했습니다. 토요일 오전엔 알핀에서 알론소 쪽 PU도 싹 교체 확정. 시즌 후반이라 다들 피로도가 상당할 걸 감안해도 요 몇 GP 사이 엔진 페널티들이 잦기는 해요.
이런저런 페널티들이 있다 보니 퀄리파잉 세션은 상위 5인만큼이나 바닥 5인도 누가 될지 궁금했답니다. Q1 시작 직전까지 RBR 개러지에서는 리어 윙들을 손보았던 모양이에요. Q1 첫 시도에서 맥라렌 드라이버들이 둘 다 준수한 기록을 보여 주면서 한국 기준으로 새벽부터 신나는 상황. Q1 막판 알파 로메오의 안토니오 지오비나치가 띄운 옐로 플랙에 영향 받은 드라이버들이 좀 있었는지, 그걸 감안해도 막판 밀어내기가 상당했습니다. 아스톤 마틴의 랜스 스트롤이 Q2 탈락했을 정도. Q2 진출 컷은 p1 +1.767. Q1에선 p5~p9 이 부근이 굉장히 촘촘했고 - 메르세데스들이 기대치 대비 저조한 기록을 보이는 등 나름 진풍경이라면 진풍경이 펼쳐졌네요. 그에 비하면 Q2는 무난했던 셈으로, Q3 진출 컷은 p1 +1.673. 어째 이번 미국GP는 꽤 벌어진 편인데 RBR이 빨라서였나 싶기도 합니다. Q3 첫 시도 이후엔 딱 다섯 팀 열 명 올라와 있는 상황에 팀별로 모이는 모습도 흥미로웠지요. 마지막 순간에 RBR의 베르스타펜이 기록 단축에 성공하면서 폴 포지션을 가져갑니다. p2는 메르세데스의 해밀튼.
드라이버스 챔피언십 경쟁자들이 맨 앞줄(!)에서 만나게 된 만큼 다들 스타트 직후 첫 랩에 기대가 상당한 분위기였습니다. 스타트 15분쯤을 앞두고서까지도 차량 수리에 바빴던 알파타우리의 가슬리네 크루들 ... 센서 문제였는지 다행히 수습에는 성공한 모양이었습니다만은. 타이어 상황은 소프트 타이어로 출발하는 페라리의 까를로스 사인스(p5), 알파타우리의 츠노다 유키(p10)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디움.
레이스 스타트 직후 옐로 플랙에 잠이 싹 달아났어요. L1/56 턴1 해밀튼 움직임은 거의 W시리즈 이번 오스틴 레이스 1에서 제이미 채드윅이 보여 주었던 그것과 비슷해 멋졌습니다. 첫 랩부터 맥라렌들이 페라리 상대로 샌드위치 만들기에 성공한 건 덤. L3/56 중하위권이 모조리 DRS 가능 범위에 몰려 있어 초반이 재미있게 흘러가는 이번 미국 GP였지요. 스타트 리플레이를 보니 베르스타펜이 해밀튼을 밀어내보려 했으나 자기가 밀려난 모양이더라고요. L7/56 해밀튼-베르스타펜 간격이 DRS 가능 범위 안에서도 기막히게 왔다갔다하는 - 0.4초대 중반에서 0.9초대까지 - 모습을 보이던 가운데 나머지들은 슬슬 간격 벌어지는 분위기. 해밀튼은 팀라디오로 베르스타펜이 더 빠른 것 같다는 리포트를. 베텔-알론소 쪽 경쟁이 재미있어 보이는데 카메라가 그 쪽으로 넘어갈 새가 없이 앞쪽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의외로 첫 스틴트를 짧게 가져가는 드라이버들이 상당수 있었지요. L10/56 베르스타펜 페이스가 분명히 앞서는데 해밀튼이 또 이걸 잘 막고 있어서 재미있게 풀리는 초반이었지요. 여러모로 이 시점에 CotA 1스톱은 무리같다는 생각이 드는 가운데 L11/56 베르스타펜 핏, 하드 타이어로 교체합니다. RBR치고 좀 미묘한 2.9초짜리 핏스톱이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해밀튼 상대 언더컷에 성공했으니 이 레이스의 판도를 가른 결정이기도 했지요(지나고 나서 하는 이야기. 보는 동안에는 RBR이 너무 일찍 불러들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상당했기 떄문입니다). 메르세데스는 해밀튼을 곧바로 불어들이기엔 위험했고, 그렇다고 오래 버티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는데 L14/56에서 핏 결정. 한편 알파타우리의 가슬리는 리어 서스펜션 문제로 L18/56 리타이어를 확정합니다. 울퉁불퉁 CotA의 희생양이었을까요. 한편 저 뒤쪽에선 13위를 두고 알파 로메오의 키미 라이코넨과 알핀의 알론소가 굉장한 드잡이를 벌였고 - 이에 대해 레이스 디렉터인 마이클 마씨한테 자기 드라이버 편을 들며 항의하는 스포팅 디렉터의 팀라디오가 잠시 중계에 나왔습니다. 올 시즌에 중계에 추가된(?) 이 FIA-팀 라디오도 재미있단 말이죠. 웃기고 치사한 양념같달까. 마씨 아저씨와 팀 사람들의 아무말, 정말 너무나 수준높은 대화여서 눈물이 다 납디다.
L26/56, 6초대였던 것 같은 베르스타펜-해밀튼의 p1-p2 간격은 3.3초대로 줄어들었고 L28/56에서 깜짝 VSC가 뜨면서 뭔가 큰 변수가 있나 했으나 마샬의 데브리 수습 목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되면서 금방 해제되었어요. RBR-메르세데스의 피트월 머리싸움은 RBR 쪽 우세였던 모양입니다. L30/56에서 베르스타펜 핏, 해밀튼 쪽은 L34/56에서 타겟 +6 또는 7 팀라디오가 보노로부터. 순위를 잃지 않고 핏스톱 가져가려면 필요한 24초 가량을 벌기에는 빠듯했지요. L38/56에서 2스톱째를 가져가며 p2로 복귀합니다. 20랩쯤을 남기고 레이스 리더까지 8초대 간격이 벌어진 상황. L44/56, 앞쪽들이 어찌나 밟고 있는지 p9부터 백마커가 된 속에서 맥라렌의 다니엘 리카도와 페라리의 사인스가 재미있는 싸움을 보여 주었지요. 10랩 남기고 3초, 라는 상황 속에 다들 앞쪽에 주목했고 - 해밀튼이 다가갈수록 베르스타펜 차가 만드는 터뷸런스 영향을 받으니 쉽지 않겠으나 꾸준히 페이스 유지하며 실수하지 않는 베르스타펜도 굉장했습니다. 마지막 랩에 0.955초 차까지도 좁혀졌지만 추월하기에는 모자랐네요. 체커드 플랙, 1.333초 차로 RBR의 베르스타펜 우승. 포디움에는 베르스타펜, 메르세데스의 해밀튼, RBR의 세르히오 페레스. 패스티스트 랩은 해밀튼이 가져갑니다.
차량 성능 차도 차이였지만 그건 올 시즌 내내 이어지고 있는 부분이니까 굳이 더 보탤 것도 없겠고, RBR 피트월의 전략적 판단이 훌륭했던 레이스였습니다. 다소 무리처럼 보였던 언더컷 시도를 성공으로 이은 데에는 전략을 충실히 수행해 낸 드라이버 역할도 크겠고요. 팀 트로피 받으러 올라갈 사람으로 전략 담당자가 갈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했는데 RBR 결정은 어째 미묘... 컨스트럭터스 챔피언십 격차를 좁히는 한편 드라이버스 챔피언십 쪽은 넓혔으니 여러모로 RBR에겐 즐거운 주말이었겠습니다. 메르세데스 쪽보다 더 우울한 건 두 드라이버 모두 DNF라는 결과를 받아든 알핀이었겠지 싶어요. 가슬리도 퇴근한 걸 생각하면 그냥 프렌치들이 모조리 안 풀린 주말이었나 싶기도.
금요일에 메르세데스 차 리어 서스펜션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었지요, 제가 보기엔 다소 호들갑에 가까웠습니다만은(어떤 분 말마따나 "우리는 그걸 다운포스 영향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같은). 만약 DAS같은 정말 끝내주는 뭔가를 해 냈다면 대단한 것이겠지만, 이 시점에 가져왔을 것같진 않고 만약 했다면 RBR 쪽이 가만 있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내년 차가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그나저나 세꼭지별이 이렇게나 엔진을 까고 있는데(?!) 외양간 쪽이 시즌 끝까지 이대로 그냥 갈지,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지든 말든 버티기로 할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이제 다소 개싸움에 가까워지고 있죠 지금의 경쟁. 확실한 내 팀이 낀 경쟁이 아니어서 그런지 소위 '팝콘 각'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맥라렌 영 드라이버 출신들에게 아무래도 마음 가는 부분이 있다 보니 메르세데스와 해밀튼 쪽을 좀더 흥미롭게 보게 되기는 하네요. 이제 2021시즌도 다섯 그랑프리 남았습니다. 287.5 vs 275.5, 과연 최종 승자는 누가 될지? 끝의 끝까지 어디 한 번 지켜보도록 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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