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5 / Round 01: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 아무튼 시작했습니다
레이스는 체커드 플랙이 뜰 때까지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곧잘(그리고 꽤나 자주) 하는 이야기이긴 한데, 2020년 첫 그랑프리부터 그렇게 되리라고는 예상을 못 했었네요. 일단 2020시즌 자체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범유행 때문에 개막전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오스트레일리아 그랑프리가 금요일 게이트 오픈을 삼십분인가 앞둔 시점에 취소되기도 했었고요. 개막전 보려고 반 년 전부터 일정 조율하고 이것저것 예약하며 기대했던 제게는 그랑프리 취소보다 그 며칠 앞서 있었던 호주의 한국인 입국금지(...방역 중요하죠, 알아요)가 더 타격이 컸습니다만은. 이 이야기는 나중에도 또 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때를 위해 남겨 두지요.
이것도 취소되고 저것도 연기되며 그것들도 빠지는 와중에(!) 결국 2020시즌 개막전으로 낙점된 서킷은 오스트리아의 레드불 링입니다. 근래 개막전을 맡았던 호주 멜번의 알버트 파크와 달리, 멕시코시티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고지대 - 해발 900미터 언저리 - 산골짝에 자리한 트랙입니다. 레드불 레이싱 팀 입장에선 홈 그랑프리인 셈이고요. 저속 코너가 적어서 파워 유닛이 많은 영향을 끼치는 곳이기도 하죠. Covid-19 상황을 고려해 당분간은 무관중으로 열릴 것 같네요(아무래도 올 시즌은 내내 그렇게 열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데까지 접촉을 줄여 방역에 신경쓰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새 프로토콜들이 적용되었고요.
목요일 드라이버 프레스컨퍼런스는 모든 드라이버가 참여하는 걸로 바뀐 대신에 잔뜩 거리를 두고 앉아 사전에 준비된 질문에 대답하는, 매우 재미없는 세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막상 개막한다니까 설레는 거 있죠. 금요일 연습주행 첫 세션도, 보통 때같았으면 나중에 기록만 체크하거나 대강 보는 둥 마는 둥 했을 텐데 그 진공청소기 - 내지는 모기 날아다니는 것 같은 - 중계에 잡히는 V6 터보 엔진 소리마저 반가웠어요. 디펜딩 챔피언인 메르세데스는 여전히 빨랐고 - 메르세데스가 약한 편인 트랙임을 감안하더라도 페이스 자체가 그들만의 세계 레벨 - RBR이 예상 외로 헤매는 모습을 보였네요. 흥미로운 점은 메르세데스의 지난 시즌 차를 충실히 참고(?)해서 섀시를 만들어 온 바람에 프리시즌 테스팅 때부터 말이 나왔던 레이싱포인트가 새 차 뽑아 온 페라리보다 페이스가 좋았다는 사실이었지요. 졸지에 삥끄 멜세(뭐 파워유닛을 메르세데스 것을 쓰긴 합니다)가 워크스 팀보다 나은 걸 보는 놀라운 경험. 아 참, 메르세데스는 전통의 실버 애로우 리버리를 던지고(!) 올 블랙에 가까운 차로 바꾸어 칠하고 나왔답니다. 이건 거의 페라리가 로쏘 코르사를 버리는 수준의 파격인데 그게 파격인 자체가 이 바닥(?)이 얼마나 고여 있는지의 한 단면이기도 하겠지요.
Black Lives Matter로 촉발된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에 이 유로피안 남자 백인 중심 스포츠도 어쨌거나 "글로벌 스탠더드"는 따르고 싶었는지, 다소 All lives matter스러운 "We Race As One" 을 들고 나왔는데 그걸 보는 아시안 여자인 저는 여엉 입맛이 씁쓸했습니다. 그렇잖아요, 꼴랑 스물인데 여자 자리 하나 없는 걸 보는 마음(이건 일요일 레이스 전 국가 연주 때 다른 방식으로 다시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어쩜 스무 명 중 열넷이 무릎꿇기에 동참했는데 여섯 명의 무릎은 그렇게나 뻣뻣하던지). 그런데도 제가 끊질 않고 있는 건 역시 제가 탈것경주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
연습주행 때 워낙 좋은 페이스 보였는지라 메르세데스는 둘 중 누구냐의 문제일 뿐 포디움은 거의 예약해 놓은 상태로 퀄리파잉 세션이 펼쳐졌는데요. 발테리 보타스가 쭉 좋은 기록들 찍어내면서 폴 포지션을 가져갔습니다. 루이스 해밀튼은 섹터2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 보여주더니 p2. 와중에 어째 페라리 파워 유닛 쓴 팀들이 하나같이 퀄리파잉을 말아먹는 바람에, 작년 파워유닛이 뭔가 규정을 위반해서 좋은 성능을 뽑아냈었나 하는 의심만 커졌네요. 한 해만에 퍼포먼스가 그렇게 뚝 떨어질 일입니까.
그건 그렇다치고 페라리는 섀시 디자인도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온보드 보니까 그립도 트랙션도 내내 불안정하더라고요. RBR도 리어가 좀 불안정해 보였고. 이러니저러니해도 1분 2초대 기록을 낸 팀은 메르세데스뿐이었으니까요. 란도 노리스 p4, 카를로스 사인스 p8로 맥라렌은 지난 시즌 보여 준 회복세를 이어 갔고요. 좋아하는 팀이 제자리를 찾아 올라가는 모습 보기 좋았습니다. 그게 좀 오래 걸려서 그렇지. 그러니까 윌리엄스도 얼른 좀 나아지면 좋겠네요(여기야말로 오래 걸릴 것 같아 아쉬운).
RBR에서는 44번 차(!)의 DAS를 걸고 넘어지는 데 이어 - 규정 적합 여부를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지만 그걸 누가 믿을까요, 아니나다를까 다음 그랑프리에는 RBR도 이 시스템을 적용해 온다는 소문이 돕니다 - 레이스 시작 한 시간여를 앞두고 Q3 막판의 옐로 플랙 상황에 메르세데스의 루이스 해밀튼이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고 항의해 기어이 스타트 +3 페널티를 먹이는 데 성공합니다. RBR의 막스 베르스타펜이 p2로 올라가게 된 건 덤. 피트레인 열리고 인스톨레이션 랩 돌러 나온 해밀튼의 주행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날이 서 보입디다.
그렇게 시작한 71랩짜리 레이스는 개막전답지 않게(또는 너무나도 개막전답게) 혼란스러웠어요. 스타트 때만 해도 깔끔한 편이었어서 그대로 메르세데스 우승 그 외로 끝날까 싶었는데 세이프티 카가 세 번 나오고, 차 스무 대 중 아홉이 리타이어했으니 말 다 했죠. 무릎꿇기에 동참하지 않았던 드라이버들이 상당수 포함된 건 아마도 #Karma. 이래저래 록다운 동안 다들 차 만드는 거 까먹었냐는 말 나올 정도로 기계적인 문제들이 이 팀 저 팀에서 속출했습니다. RBR의 베르스타펜이 L10쯤에 파워유닛 문제로 조기 퇴근하고(대체 왜 안티스톨이 계속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스 드라이버들은 둘 다 브레이크 문제에, 메르세데스마저도 기어박스 센서 문제 있으니 연석 좀 작작 밟으란 이야기(*약간의 왜곡 있음)가 팀라디오로 나왔고요. 두 번째 SC 상황에서 메르세데스들도 핏하는 게 맞지 않았겠냐는 이야기가 레이스 끝나고 나왔지만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게 정말 혼란스러웠단 말이죠(...). L55쯤 알파로메오의 라이코넨 차가 마지막 코너에서 크래시하더니 갑자기 오른쪽 앞바퀴가 빠져 날아가지를 않나. 이래저래 마지막 SC가 해제되고 나니 L60쯤이더라고요. 그때부터는 마치 지난해 인터라고스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막판 스프린트 - 알본과 해밀튼 배틀 와중에 컨택, 알본 포디움권에서 밀려남 - 해밀튼 페널티 - 맥라렌 드라이버가 포디움으로. 해밀튼의 5초 타임페널티를 고려하면 노리스가 바짝 밟아야만 포디움엘 갈 수 있었는데, 마지막 랩에 패스티스트 랩을 기록하더니 기어이 포디움엘 가더라고요. 해밀튼에겐 아쉽게 되었습니다만 노리스에게는 F1 데뷔 후 첫 포디움입니다. 맥라렌 팀을 좋아하는 입장에선 포디움도 포디움인데 패스티스트 랩이 얼마나 반갑던지 기념으로 라이브타이밍 화면 스크린샷도 떴답니다. ☺️
보타스 우승, 2위는 페라리의 샤를 르클레르, 3위 노리스. 백인들 셋이 "End Racism" 티셔츠를 펼쳐 들고 있는 모습은 참, 뭐라 해야 할지. 그래도 메르세데스에서 컨스트럭터 트로피를 받으러 여자 크루 올려보낸 건 좋았네요(트랙사이드 파워유닛 엔지니어 홀리 챕먼Holly Chapman이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지만 보이게끔 뭐라도 하는 게 중요할 때가 있죠.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걸 두드리고 있는 지금은 거의 한 주가 지나 2라운드를 앞두고 있는 목요일 저녁인데, 제가 레이스 끝나고 한 트윗을 보니 "다음주 기대되는 부분들: 해밀튼 분노의질주 모드(특히 섹터2) / 각 팀들의 차 고쳐오기, RBR의 졸렬모드는 계속될 것인가 / 윌리엄스 과연 포인트피니시 성공?" 이라고 되어 있네요.
하지만 지금은, 즐겨요 이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