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1 그랑프리 잡담/season 2021

2021-12-06 / Round 21: 사우디아라비아 그랑프리 - 원점 아닌 원점

by p 2021. 12. 29.

시즌이 마무리되고 난 이제서야 적는 사우디아라비아 그랑프리 이야기입니다. 올해 캘린더에 새로 들어온 곳이죠 사우디아라비아 제다도. 서킷 레이아웃부터가 참 심란한데다 거의 개최 직전에야 완공되다시피 하는 바람에 사고 우려가 컸고, 아니나다를까 아랫시리즈 - 특히 F2 - 에서 큰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내내 심란했던 주말이기도 합니다. 챔피언십 1위 경쟁이 근 십 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격화된지라 더 걱정되는 것도 있었고요. 야간 레이스였던 바람에 한국에서 보긴 시간대 난감했던 것까지 참, 이래저래 시작 전부터 긍정적인 쪽보다는 부정적인 쪽들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었네요. 윌리엄스 팀 설립자 프랭크 윌리엄스 경이 타계하기도 했고. 탈것경주의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자 업계의 "어른"이시다보니 많은 추모 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록지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제다 서킷은 턴 번호는 일단은 27까지 매겨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코너"라고 부를 만한 곳은 또 많지 않아 보이는데, 좁고 복잡한 구조인데 또 흐름은 빠른 괴상한 곳이었어요. 내년 개막 전에는 이곳저곳 손 좀 봐야겠더라고요. 안전을 고려해서. 

 

연습주행 첫 세션은 처음 온 서킷 첫 세션답게 다들 어떤 셋업으로 달리고 있을지 가늠이 어려웠습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F1 드라이버들이긴 한 것이, 저런 서킷을 처음 달리면서도 FP1을 큰 사건사고 없이(=옐로 플랙이나 레드 플랙 상황 없이) 무난하게 소화하더군요. 서킷에 대한 인상은, 추월이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아도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정도의 가능성 아닐까 싶었고요(그런 점에선 카타르 그랑프리와는 반대). 첫 세션은 알파 로메오의 안토니오 지오비나치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무난한 - 예측 가능한 범위의? - 기록들로 마무리. 

FP1 최고기록은 FP2 시작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깨졌습니다. 조명은 마리나 베이보다 더 밝은 느낌이었어요. 트랙 리밋 잡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아차하는 순간 벽과 입맞춤할 것 같은 아슬아슬함 속에 - 페라리의 샤를 르클레르가 방호벽을 들이받으며 레드 플랙. 다행히 드라이버는 폴짝 뛰어나왔습니다만 꽤 걱정되는 장면이었습니다. FP2는 레드 플랙과 함께 그대로 마무리됩니다. 

야간 레이스 있는 주말의 낮시간 연습주행 세션들은 아무래도 조금 느슨하게 마련이지요, 퀄리파잉 세션이나 레이스가 더 중요하다보니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차이입니다만. FP3에선 여러 타이어들 기록이 섞여 나왔고, FP2 막판 레드 플랙 때문에 스타트 연습 충분히 못 했다고들 생각하는지 막판에 다시 나오는 드라이버들이 좀 있었던 것 외엔 큰 기록 변화나 다른 파격(?)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페이스 예상을 빙자한, AWS가 제공하는 아무숫자대잔치도 여전했네요. 그나저나 페라리 크루들은 고생 많았겠어요. 차 다 고쳐서 시간 맞추어 내보낸 걸 보면 참, 드라이버들이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기는 해도 팀의 다른 사람들의 고생을 간과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듭니다. 

 

퀄리파잉 세션에서는 생각보다 기록 당겨지는 정도가 크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슬아슬하지 않았단 이야기는 아니었지만요. Q2 진출 컷은 p1 +0.923, Q3 진출 컷은 p1 +0.904. Q2에서 페라리의 까를로스 사인스가 리어 윙을 벽에 스치면서 옐로 플랙을 띄운 것 외에는 큰 사건이 없을 뻔 했으나 문제는 Q3였죠. 메르세데스의 루이스 해밀튼이 Q3 첫 시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차를 살리면서 상대적으로 저조한 시작(1분 48초대), 그래도 두 번째 시도에서 1분 27초 511로 0.142초 차로 세션 최고 기록을 냅니다. 

공식 계정에서 Q1, Q2 기록지는 따로 안 올려 주는 바람에 이것만 올려 둡니다.

문제는 체커드 플랙 이후였는데, 레드불 레이싱의 막스 베르스타펜이 Q3 2차 시도에서 섹터 1, 2를 모두 퍼플로 마무리했지만 마지막 코너에서 벽에 부딪히면서 폴 포지션이 해밀튼에게. 올 섹터 패스티스트로 베르스타펜 폴이겠거니 했는데 27개 코너 중 27번째에서 사고가 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이번 제다처럼 좁은 트랙 아니었다면 살려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진입 속도가 너무 높았어요. 와중에 페라리의 르클레르가 p4, 알파타우리의 피에르 가슬리가 p6 기록하면서 그리드가 재미있게 구성됩니다: 베르스타펜-르클레르 같은 줄이 이렇게 끝에서 두 번째 그랑프리에서. Q2 도중이었나, 메르세데스의 발테리 보타스도 알파 로메오의 지오비나치 차가 조금만 더 깊게 스쳤다면 큰일날 뻔 했지요. 어째 p1, 2, 3 모두 퀄리파잉 도중 사고 위험 있었거나 겪은 케이스여서 부디 안전한 레이스 되기만을 바란 새벽이기도 했습니다. 

 

F1 레이스에 앞서 열리는 서포트 레이스, 그 가운데서도 F2 쪽에서 사고가 크게 나는 바람에 걱정 가중된 레이스 스타트였어요. top 10에선 맥라렌의 노리스만 소프트 스타트. 나머지들은 미디움. 그 외엔 p11 리카도, 15 사인스, 17 베텔 하드로 포메이션 랩 시작합니다. L0/50, 드론 카운트다운 그럴듯하더군요. 과연 사우디아라비아의 재력인가 싶기도. 

 

L1/50 F1답게(?) 일단은 검증된 드라이버들이 올라와 있어서인지 스타트까지는 무사했습니다. 문제는 위에 올려 둔 서킷 맵에서도 보시다시피 제다는 DRS 구간이 셋이나 되기 떄문에, DRS 활성화되면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타트 때 첫줄의 메르세데스들은 깔끔했고 맥라렌들은 중간에서 휘말리지 않는 데에 성공, 그러나 아스톤 마틴의 랜스 스트롤과 윌리엄스의 조지 러셀은 살짝 부딪혔던 모양입니다. L4/50 상황에 이미 p3 베르스타펜 - p4 르클레르 간격이 2.5초대로 벌어졌고, 어째 분위기는 마리나 베이와 모나코를 비벼서 좁은 틈에 구겨넣고 몬차급 빠르기로 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L10/50 옐로 플랙, 하스의 믹 슈마허가 턴21-22 '그 구간'에서 크래시(FP2 때 르클레르 사고 났던 그 자리였어요). 차는 박살났지만 드라이버는 다행히 무사했습니다. 세이프티 카가 나오고 그 틈에 피트인해 속속 하드 타이어로 바꾸어 나오는 드라이버들이 있었던 가운데 RBR의 베르스타펜은 버티기를 선택합니다. 메르세데스에서는 두 드라이버를 모두 불러들여 2.4초, 3.4초. RBR에선 베르스타펜은 버티고 세르히오 페레스 쪽은 타이어 교체, 이쯤 되면 위기 감수가 아니라 도박이지요. SC 뒤에서 레이스가 이어질 듯하다 배리어 수리 시간이 걸릴 모양인지 L13/50에서 레드 플랙이 선언됩니다. 금요일 같은 자리에서 사고 났을 때는 곧바로 레드 플랙이 발령되었었는데 SC가 꽤 이어진 것도 의아하기는 해요. 현지 시각 21:15 레이스 재개, 스탠딩 스타트 결정. L15/50 리스타트, 보타스 휠 록 아슬아슬했고 해밀튼이 턴1을 자르고 들어오는 베르스타펜과 크래시할 위기를 간발의 차로 피한 틈에 알핀의 에스테반 오콘이 이득을 얻었습니다. RBR의 페레스와 하스의 니키타 마제핀을 중심으로 중간-뒷쪽이 난리가 나서 다시 레드 플랙 발령. 

문제는 이후의 재시작이었는데, 레이스 디렉터 마이클 마시와 RBR의 스포팅 디렉터 조너선 위틀리 사이의 "제안"이었습니다. 리스타트 후 벌어졌던 베르스타펜의 턴1 컷 문제 때문이었는데요. 레이스 도중이었다면 페널티까지 가기 전에 트랙에서 포지션을 돌려 주면 되었겠지만 레드 플랙 상황이다 보니 - "제안"이 오간 모양입니다만, 적어도 2011시즌 중반 이후로는 전 그랑프리를 다 챙겨 본 제가 보기에도 처음 보는 풍경이어서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무슨 트랙 포지션을 두고 레이스 디렉터와 팀의 스포팅 디렉터가 거래(처럼 들리는 대화)를 하나요? 

L17/50 리스타트, 미디움으로 갈아신은 베르스타펜 쪽이 유리한 게임입니다. 인사이드에서 오콘과 살짝 부딪혔지만 그대로 진행. DRS 없이 오콘을 앞질러가며 L18/50 해밀튼이 p2 자리를 가져가면서 리더까지 1.137초, 이후 두 랩이 채 지나지 않아 p2 - p3 격차가 3초대를 넘어섭니다. 앞쪽에서는 패스티스트 랩을 기록하며 뒤쫓는 해밀튼을 베르스타펜이 섹터 패스티스트로 응답, DRS 범위에 잡히지 않으려면 밟아야 하고 그러나 앞차는 미디움 타이어를 장착한 만큼 뒤쫓는 하드가 무리해도 누가 실수를 하지 않는지와 어느 쪽 타이어가 먼저 닳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될 싸움이었습니다. L23/50 알파타우리의 츠노다 유키 사고로 VSC 발령, 그 시점 p2-p3 인터벌이 12초가 넘었던 걸 보면 저 앞이 얼마나 밟았는지 가늠할 수 있지요. 

천하의 페르난도 알론소가 스핀하는 걸 다 보고, 맥라렌에서는 다니엘 리카도와 란도 노리스가 각자 자기들의 레이스를 하느라 바빴던 와중에 - 리카도는 보타스와 올 시즌 어째 악연이 있는 듯합니다. 노리스는 SC와 레드 플랙 전후로 포지션을 많이 잃었지요 - 아스톤 마틴 드라이버들도 주말 내내 고생이 많았군요. L25/50 해제되었던 VSC가 L28/50에서 다시 선언(이번엔 트랙에 떨어진 데브리 문제였던 듯), 또 해제되는 듯하다 다시 VSC. 이 반복되는 VSC 상황들에서 도움 받는 드라이버들이 있긴 있나 궁금했습니다. VSC 뜨면 SC 때와 다르게 간격이 다닥다닥 붙기보다는 오히려 벌어지니까요. 되풀이되는 VSC들 때문에 무슨 해밀튼이 DRS 레인지에 베르스타펜 잡을 때를 기다렸다가 선언하나 하는 오해가 다 생길 지경. L37/50 달아나는 베르스타펜과 매섭게 따라붙는 해밀튼, 대단한 경쟁이었습니다만 인터라고스 되풀이라 보기에도 민망한 일들도 벌어졌습니다. 인터라고스에서의 밀어내기가 실수 감안할 만한 - 그래도 좀 많이 밀리긴 했지만 - 상황이었다면, 이번에 턴1을 자르고 넘어갔을 때에는 RBR 피트월조차 자리 내어주라고 할 정도였는데 부딪혔거든요. 이어 턴27에서 갑작스러운 감속으로 충돌을 유도한 건 좀 심했고요(*링크된 pdf 문서에 보다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브레이킹에 대해서는 베르스타펜 과실 인정, 스튜어드들이 베르스타펜에게 벌점 2점과 기록에 10초 추가 페널티를 부여했습니다. 레이스 끝나고서야 결론이 나오는 바람에. 개인적으로는 베르스타펜 DSQ까지도 가능성 있는 사건이었다고 봅니다).

 

L39/50 해밀튼은 피트인 없이 일단 달리고는 있었지만 프론트윙 오른쪽 엔드플레이트가 나간 만큼 공기역학 측면에서는 손해가 상당했을 겁니다. 그래도 벌어 놓은 인터벌이 있어 p2는 유지하더군요(p3 오콘이 20.5초 넘게 뒤에 있었음). 제다같은 좁은 트랙이 아니라 런오프가 넉넉한 폴 리카르 같은 곳이어도 그렇게 갑자기 속력 줄이면 안 되죠. 사고 난다고요. 스튜어드들이 조사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 자리 돌려주려고 속력 늦춘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대놓고 레이싱 라인에서 벌어진 일이라 뒷차 입장에서는 지금 브레이크 테스트 하나 소리가 나올 만 한 상황이었거든요. L42/50 될 때까지도 해당 사고는 조사 중으로, 이것만 놓고 보아도 결론이 무엇이 되어 어떤 결과가 나오든 논란의 그랑프리가 될 것은 확실했습니다. (*12월 29일의 첨언: 그러나 이것도 야스 마리나에 묻힌 느낌입니다)

 

L43/50 해밀튼이 베르스타펜을 추월하면서 레이스 리드. 보타스가 포디움에 가길 바랐으나 VSC들 때문에 남은 랩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프론트윙 망가진 차로 L46/50 해밀튼이 패스티스트 랩 기록. 해밀튼의 레이스엔지니어 보노는 연석 조심하라는 팀라디오를 보냈습니다. 타이어가 아슬아슬할 때기는 했지요. 베르스타펜도 체커드 플랙 받고 싶다면 페이스 조절해야 했을 거고요(하드 대 미디움임을 고려합시다). 체커드 플랙, 우승은 메르세데스의 해밀튼, 2위는 RBR의 베르스타펜. 그리고 마지막 랩의 마지막 순간에 메르세데스의 보타스가 알핀의 오콘을 추월하면서 포디움 남은 한 자리를 가져갑니다. 역시 Q3 100연속 진출에 빛나는 무민, 믿고 쓰는 핀란드 드라이버. 피니시 라인에서 p3 가져가는 모습 멋졌습니다. 

 

해밀튼이 제다에서 우승과 함께 패스티스트 랩 1포인트를 추가로 챙기면서 드라이버스 챔피언십은 동점이 됩니다. 9라운드 오스트리아에서 32포인트차까지 벌어졌던 걸 다 따라잡아 올라왔군요. 챔피언십을 가져가는 드라이버들에게는 그 시즌에 <그런데 이걸 해 냄> 순간이 있게 마련이라 생각하는데 - 2020시즌 실버스톤에서 타이어 셋으로 우승한 해밀튼이라든지 말이지요 - 이 날 제다의 해밀튼도 상당했네요. 메르세데스는 컨스트럭터스 챔피언십 1위에 보다 가까워집니다. 그래서인지 포디움에 팀 트로피 받으러 함께 올라간 건 스포팅 디렉터 론 메도우스 씨.... 진짜 RBR이랑 싸우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마지막 한 그랑프리를 남겨 두고 드라이버스 챔피언십 포인트 동점이라니, 사실 이대로 끝나도 승수에서 베르스타펜이 앞서기 때문에 베르스타펜 1위입니다만 - 불안해지면 참 사람이 뾰족해지고 그렇게 되기 쉬운 모양인지 트위터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편이었습니다. 결국엔 그냥 탈것경주인데 그깟 챔피언십 경쟁이 다 무엇인지. 애먼 사람들한테 어두운 마음 발산하는 것 딱히 좋은 취미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도 되도록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편입니다(그래도 혼다는 내 팀에는 왜 그랬냐 하고 종종 급발진하긴 합니다;). 호불호나 응원 여부를 떠나, '그 드라이버라면 어떻게든 해 낼 것 같다는 기대 내지는 신뢰를 주는 드라이버들이 있지요. 그런 드라이버의 주행을 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이 거대한 막장 드라마를 아직도 보고 있는 것이겠습니다만은. 

 

살짝 지나고 나서 보니 참, 그게 다 뭔가 싶기도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게 하는 것? 달리고 싶은 마음? 그런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좀 더 긴 이야기 겸 올 시즌의 마무리는 다음 아부다비 그랑프리 잡담에 이어 하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