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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그랑프리 잡담/season 2021

2021-12-13 / Round 22: 아부다비 그랑프리 - 체커드 플랙

by p 2021. 12. 31.

"자격이 있는", "그럴 만 한" 같은 이야기는 대상보다 그 이야기를 꺼낸 화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 줍니다. 야스 마리나 이후 deserved라는 영문 표현만큼 저를 피곤하게 만든 것도 드물 거예요. 이 표현이 새롭게 탄생한 드라이버 챔피언에게 그렇게까지 자주/많이/되풀이해 쓰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축하보다도 그 "합당함"을 간접-증명이라도 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지요. 이것은 전적으로 레이스 디렉터 마이클 마시의 문제 때문입니다(그 또한 빙산의 일각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입니다만은).

 

평소같으면 서킷 맵과 기록지들을 쭉 늘어놓고 각 세션들에 대해 이야기했겠지만, 이번 시즌 최종전은 좀 달랐지요. 그러니 기록지들은 그야말로 '기록'으로 남겨 두고 아래에서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포뮬러 원을 일컬어 모터스포츠의 정점이라 부릅니다. 그것이 F1의 오만한 자칭이든, 탈것경주를 지켜보는 이들의 암묵적 합의이든 간에 F1은 반세기 넘게 그 정점을 이어 왔지요. 2021년 F1 챔피언십 경쟁은 적어도 최근 십 년 간 보기 드물었던 근접전이자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너무나 아슬아슬한 나머지 1위 경쟁자 두 드라이버가 마지막 그랑프리를 남기고 동점을 기록했을 정도니까요. 

F1을 뒤집으면 IF라는 해묵은 말장난이 있을 만큼 포뮬러 원은 "만약에"들로 뒤덮여 있고, 모두가 결코 전체를 이야기하지 않고 - 이야기하기 어렵죠 - 작은 우연과 놀라운 결과들이 겹쳐 때로는 즐거운 토론이, 대체로는 피곤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번 시즌의 드라이버 챔피언십은 레드불 레이싱의 막스 베르스타펜이 획득했고, 분명 이번 시즌에 베르스타펜이 보여 준 모습은 그 흠결들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십을 가져갈 만 한' 것이었어요(특히 폴 리카르에서부터 레드 불 링 2연전으로 이어지는 때가 정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사우디아라비아 그랑프리 직후 챔피언십 경쟁자는 동점을 기록, 승수에서는 베르스타펜이 앞섰고 최근 경기들에서는 메르세데스의 루이스 해밀튼이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럼 아부다비 그랑프리, 야스 마리나 서킷에서 누가 이겨야 했을까요? 그건 알 수 없게 되었어요. 마지막의 마지막에 레이스 디렉터가 레이스에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2021시즌 야스 마리나를 이야기하면서 중립을 지킬 생각이 없습니다. 바닥이 기울어져 있는데 기어를 중립으로 놓으면 차는 기울어진 방향으로 굴러가게 마련이지요. 

 

떠오르는 신예와(데뷔 7년차를 신예라 부를 수 있을지는 다소 어폐가 있다 생각합니다만 일단은 "세대"의 차이를 인정합니다), 전례가 없는 8회째 타이틀 획득을 목표로 하는 드라이버의 경쟁은 그럴듯한 드라마를 제공합니다. 이들이 시즌 내내 보여 준 치열함은 굉장했습니다. 저도 이번 시즌 들어 종종 농담삼아 중하위권 팀들을 F1.5로, 이 둘을 F0.5로 부르고는 했군요. 물론 두 드라이버 다 실수나 흠결은 있었어요. 이몰라에서 그래블에 빠지던 때나 바쿠의 리스타트 브레이크 실수는 분명히 7회 챔피언이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몬차 사고나 인터라고스의 밀어내기, 제다의 "브레이크 테스트"도 신예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실버스톤이나 헝가로링은? 그건 경주 중 사고였지요. 후폭풍이 남달랐을 뿐. 

 

야스 마리나 주말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그랑프리였습니다. 연습주행에서 메르세데스 드라이버들이 보여 준 모습, 퀄리파잉 세션 Q2에서 RBR이 디메리트를 감수하고서라도 꺼내들어야 했던 소프트 타이어, 결과적으로 폴 포지션을 가져간 소프트의 베르스타펜을 상대로 미디움 타이어로 p2 스타트를 하게 된 해밀튼까지. 야스 마리나에서 F1이 열린 이래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우승자는 모두 폴 시터였던 만큼 RBR의 다소 과감한 선택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다만 베르스타펜이 언제까지 해밀튼을 뒤에 둘 수 있을지, 미디움에 비해 소프트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야스 마리나의 새 레이아웃이 1스톱 레이스를 가능하게 할지, 정말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그 모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지점을 짚어야 합니다. 어떤 드라이버의 놀라운 스타트와 페이스 관리, 흠잡을 데 없던 피트스톱이 우승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경쟁 드라이버와 팀의 더 나은 플레이가 아니라 레이스 디렉터의 "디렉팅" 이었다는 것을요. 

 

레이스 종료까지 약 다섯 랩을 남긴 상황에서 윌리엄스의 니콜라스 라티피가 하스의 믹 슈마허를 추월하려 하다가 그만 방호벽에 부딪혔고 세이프티 카가 발령됩니다. 레이스 리더는 메르세데스의 해밀튼. 메르세데스에서는 트랙 포지션을 잃을 수 있으므로 - 체커드 플랙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 피트인 없이 그대로, 한편 RBR에서는 베르스타펜을 불러들여 새 소프트 타이어를 장착합니다. 백마커들이 있었고 해밀튼과 베르스타펜 사이에도 여러 대가 끼어 있었지요. L56/58에서 레이스 컨트롤은 "Lapped cars will not be allowed to overtake" 메시지를 내보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랩인 L57/58에서 레이스 컨트롤이 "Lapped cars will be allowed to overtake" 메시지를 내보냄과 함께 뭉쳐 있던 차들 중 해밀튼과 베르스타펜 사이 다섯 대만이 SC를 추월할 수 있도록 풀어 줍니다. 그 시점 lapped car는 열둘이었는데 딱 챔피언십 1위 경쟁 중인 두 드라이버 사이의 차들만을 치웠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입니다. L58/58, 소프트의 베르스타펜은 40랩 이상 달린 하드 타이어의 해밀튼을 추월하고 레이스(?)에서 첫째로 체커드 플랙을 받습니다. 우승(?)은 베르스타펜, 포디움에는 베르스타펜, 해밀튼, 페라리의 까를로스 사인스가 오릅니다. 

2021 FORMULA ONE SPORTING REGULATIONS 중 문제의 조항 발췌. 전문은 FIA 홈페이지에서 PDF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규정 48.12에서 "트랙 조건이 추월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경우 '추월은 허용되지 않음' 메시지가 공식 메시지 시스템을 통해 모든 참가자들에게 전송된다"고 명시하고 있는 만큼 레이스 디렉터가 처음에 추월 금지 메시지를 내보낸 것은 이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에서 두 번째 랩에서 레이스 디렉터는 해밀튼과 베르스타펜 사이에 끼어 있던 차들 - 노리스, 알론소, 오콘, 르클레르, 베텔 5명 - 에 한해서만 언랩을 허용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죠. 레이스 종료 이후, 저 규정의 '모든 참가자들' 부분을 지적하며 메르세데스는 스튜어드에 항의했으나 이 항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기각됩니다. 

메르세데스의 항의와 그에 대한 기각 결정 문서 일부 발췌. 마찬가지로 전문은 FIA 홈페이지에서 PDF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스튜어드 룸에서 승자가 지정되는 상황만큼은 피하려고 그렇게들 노력을 했는데, 결국 레이스 디렉터가 가장 중요한 시점에 규정을 노골적으로 수정하며 챔피언십에 개입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 버린 느낌을 거둘 수 없군요. FIA는 자체 규칙을 어겨 가면서까지 SC 상황을 비틀어 "트랙에서 디펜딩 챔피언을 추월하며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하는 장면"을 만들었지만(* 포인트가 같더라도 승수에서 베르스타펜이 앞서기 때문에, 메르세데스의 항의를 받아들여 레이스 자체를 무효로 돌려도 챔피언십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베르스타펜에 타임 페널티를 부과하지 않는 이상. 다른 드라이버들도 이 레이스를 제외해도 챔피언십 순위에 영향은 없음), 해밀튼은 파크 페르메에서도 이후 포디움에도 품위를 지켰습니다. 포스트 레이스 프레스컨퍼런스에 불참한 건, 글쎄요, 그런 레이스를 겪고 나면 있을 수 있는 반응이라 생각하기 때문에요. 

이 잡담을 두드리고 있는 시점에서는 메르세데스가 추가 항의 절차를 포기했고 - FIA에 항의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며 "절차상의 공정함"을 기대하기 어려운지도 함께 밝혀졌죠 - 연말의 FIA 시상식에 챔피언십 1~3위 드라이버가 모두 참가해야 한다는 "규정"을 깨고 2위의 해밀튼이 불참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이 "규정"에 대한 저의 입장은 트위터에서 짧게 남겼던 그 때와 같습니다. 

 

탈것경주에서 규정이 중요한 이유: 그것은 경주가 계속되기 위한 대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최선을 다하되 상대를 내가/상대가 나를 해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위한 최소한의 밑바탕이 탈것경주의 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sporting과 technical 모두요. 그러니 새로운 챔피언을 위해서 자체의 "원칙"조차 굽힐 수 있다는 것이 FIA의 입장이라면 그 입장은 수정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응원하는 팀이나 드라이버가 이런 "굽히기"를 통해 이득을 얻게 된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칙이란 그런 것이지요. 언제든 뒤집거나 입맛에 맞게 비틀 수 있다면 그게 어떻게 모두에게 같게 적용될 수 있다고 담보할 수 있습니까. 이 야스 마리나의 문제가 FIA(와 FOM)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기려면 이길 상대가 필요해요. 경쟁에서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죠. 중요한 건 나와 상대의 존재입니다. 규정은 서로(들)을 받아들이는 틀이 됩니다. 하다못해 가위바위보조차도 그런데 - 바위 대신 상대를 주먹으로 쳐도 그걸 바위 냈다고 할 수 있는지? - 탈것경주같이 까딱하면 목숨까지 여파 미칠 수 있는 "놀이"에선 더 그렇습니다. 이기려는 마음, 무엇이든 하겠다는 노력과 태도, 모두 좋아요. 경쟁 구경 정말 좋아합니다 저도. 그러나 이기려면 무엇보다 이길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 - 저는 여기로 돌아가게 되고 그래서 야스 마리나의 석연찮은 레이스 "디렉팅"이 떨떠름합니다. 헝가로링으로 돌아가 봅시다. 보신 분들이라면 알론소 대 해밀튼의 치열했던 휠투휠 기억하실 텐데요. 저는 그게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존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해요. 언제든 상대가 나를 들이받을 수도 있다, 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런 움직임들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반대에 해당하는 순간이 제다의 베르스타펜-해밀튼 "브레이크 테스트"였다고 보고요. 마찬가지로 흰 선으로 그어 둔 트랙 경계 따위 언제고 무시해 버릴 수 있다면 애초에 휠투휠은 고사하고 경주 자체가 성립하지도 않고 성립할 수도 없어요. 마이클 마시가 레이스 디렉터다 보니 대표로 욕을 먹고 있습니다만, 여하튼 FIA가 2021시즌 F1에서 내린 여러 석연찮은 결정들, 특히 야스 마리나의 그것은 바로 그 대전제를 건드리는 것이었어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정"은 챔피언-만들기 뿐만 아니라 다른 드라이버와 팀들의 경쟁도 망쳤습니다. 그들도 레이스 중이었다고요. 챔피언십 컨텐더만이 달리고 있는 게 아니었단 이야깁니다. 논란거리의 핵심이 드라이버스 챔피언십 1위에 엮여 있다 보니 저도 이 잡담에서 다른 드라이버나 팀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하긴 했습니다만은. 

 

어떤 가능성이란 놀랍게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발휘되기도 합니다. 실수에서 배우는 것들도 많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실수도 피할 수 있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는 것도 없고요. 무엇인가를 감수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뛰어든다는 것, 이 모든 복잡함과 사소한 디테일 속에 순간의 판단과 그게 불러오는 결과들과, 그 모든 빠르기와 아름다움을 저는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했던지라 이번 야스 마리나가 남긴 아쉬움이 큰가봅니다. 사실 금방 두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거든요 이 잡담도. 평소처럼 다음을 기대하며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갈등은 너무 깊고 논란은 가라앉은 듯 조용히 더 끓고 있는 와중에 다음을 기대하기란 욕심일까요. 대규모 규정 변화를 앞둔 V6 터보 하이브리드의 어떤 정점은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어 버렸습니다. 스무 드라이버들, 열 팀들, 내가 좋아하는 팀에 대해서도 보다 길게 두드려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피곤합니다. 

 

블로그에서는 조금 쉬고, 트위터에서는 평소에 가깝게 그러나 어쩌면 조금은 뜸하게 탈것경주 이야기 이어 가겠습니다. 종종 뵙지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기를 미리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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