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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그랑프리 잡담/season 2021

2021-10-10 / Round 16: 터키 그랑프리 - 무거운 것과 무서운 것

by p 2021. 10. 18.

막판 대 혼란의 러시아를 지나 터키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일본 그랑프리가 열렸어야 했을 주말입니다만 역병 시국에 힘입어(?) 스즈카 자리에 이스탄불 파크가 또 한 번 들어왔네요. 지난해에는 하도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곳이라, 새로 포장한 길에 비까지 내려서 그립 문제를 호소한 드라이버들이 많았는데, 올해는 완전히 달라진 - 그렇다고 또 많이 달랐냐면 그렇지만도 않은 -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챔피언십 경쟁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다 보니, 그랑프리 주말 시작 전부터 메르세데스에서 페널티를 감수하고 루이스 해밀튼 차 엔진을 교체할지 여부가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페라리에서는 팀 프린시펄 마티아 비노토가 내년 차량 개발 집중을 위해 팩토리에 머문다는 알림을 내놓았습니다. 페라리 피트월에 비노토 없으면 그 GP 잘 풀린다는 징크스(?)를 활용하려는 것이었는지.... 모를 일이죠. :)

 

언제나처럼 지도와 기록지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랑프리 때만큼 탈것경주 관계자도 구경하는 사람들도 특정 지역 날씨에 관심 갖는 때가 또 있을까요. 금요일 맑음, 토요일 비 가능성, 일요일 흐림 및 소나기 예보와 함께 주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저곳 그립 나아졌다는 이야기에 작년 첫 랩같은 풍경 보게 될 가능성은 살짝 수그러들었지요. 원래는 스즈카 주말일 뻔했던 만큼 레드불 레이싱에선 혼다 스페셜 리버리를 맞춰 왔는데, 마침 한글날을 앞둔 한국 사람 입장에선 사이드포드와 리어 윙의 'ありがとう'가 괜히 신경쓰이기도. '양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같잖아요. :( 

 

FP1 전, 페라리의 까를로스 사인스와 메르세데스의 해밀튼이 엔진 교체를 확정합니다. 파워 유닛 관련 요소들을 모두 교체하기로 결정해 맨 뒤로 가게 된 사인스와 달리, 해밀튼은 ICE만 교체하면서 10그리드 페널티 확정(왜 전체를 교체하지 않았는지는 이 때부터 이야기가 나왔고, 레이스 이후 메르세데스 디브리프에서 다시 설명이 되었습니다). 타임라인에선 해밀튼이 p19에서 p2로 피니시했던 2006시즌 GP2(*현 F2)때 에피소드가 다시 언급되기도 했네요. 기대치란 무엇일까 싶지요. 첫 세션 초반부터 날아다니는 수준의 기록을 내고 있었으니 그랬을 만도 합니다. 작년 상황이 여러모로 특수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FP1 때 메르세데스들 기록이 좋긴 했어요. RBR 입장에서는 몹시 거슬렸겠고, 러시아 GP 때 좋은 모습 보였던 맥라렌의 부진도 눈에 띄었습니다. 단순히 프로그램 수행 차이라기에는 리더보드에 남은 기록만 봐도 좀 갸웃하게 되는 수준이었어서요. 날이 개니 다시 미끄러진 윌리엄스들의 기록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게 됩니다. FP2에서도 메르세데스 강세는 이어졌고, 페라리의 샤를 르클레르가 좋은 기록을 내는 한편 RBR 쪽은 살짝 그에 못 미치는 모양새여서 어느 팀이 확실하게 빠르다고 말하기가 애매한 상황이 되었어요. 메르세데스 강세긴 한데 그게 얼마나 강세냐에 대해서는 판단을 주저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여기저기 언더스티어 겪거나 트랙 벗어나는 드라이버들 나왔지만 크게 레드 플랙 뜰 일은 없이 무난히 금요일 마무리되었습니다. 

 

토요일은 예보대로 비, 풀 웻부터 인터미디엇까지가 나왔습니다. 흥미로운 건 일부 드라이버들 - 특히 메르세데스들 - 이 남들의 절반 수준만 달렸던 점인데요. 세션 초반 윌리엄스에서 보트 레이스(!)를 시도하기도 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누군가 굉장한 기우제라도 지냈는지 예보 한 번 굉장하더라고요. 35분쯤을 남기고 윌리엄스의 조지 러셀이 턴2 바깥쪽 그래블에 빠지면서 레드 플랙.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고, 생각보다 빠르게 수습되어서 별 시간 손해 없이 세션 이어졌습니다. 알파타우리의 피에르 가슬리가 좋은 기록을 냈고, 메르세데스 개러지에서는 해밀튼이 일찌감치 폴 포지션(?)을 선보이기도. 청년 가장 가슬리가 이고 지고 달린 알파타우리가 기록지 맨 윗자리에서 버티는 가운데 금요일보다는 밸런스를 찾은 듯한 RBR, 여전히 의심스러운 맥라렌, 남들보다 덜 달려서 섣불리 페이스 짐작하기가 어려운 메르세데스 - 정도로 연습주행 마지막 세션도 마무리되었어요. 

 

퀄리파잉 세션은 시작부터 비 오기 전에 빨리 기록부터 만들려는 분위기였습니다. 시작부터 모두모두 소프트. 비가 온다면 턴 11, 14 부근부터 올 것 같다는 팀라디오가 세션 극초반부터 드라이버들에게 전해졌고 다들 기록 내기에 바빴지요. 마음이 급해서인지 오버런하거나 스핀하면서 옐로 플랙 띄우는 드라이버들도 속출했고요. 그리고 빗길 되니 갑자기 전보다 좋은 기록 내기 시작하는 드라이버들.... 이렇게까지 고정관념에 충실할 일인지. 알파타우리의 가슬리는 FP3에 이어 여기서도 훌륭한 드라이빙을 보여 줍니다. RBR 차들이 간만에 Q1부터 꾹꾹 채워 달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요(소치 때 어차피 페널티 있다는 핑계로 일찌감치 세션 접었던 적이 있다 보니까). Q2 진출 컷은 p1 +1.102초. 이러니저러니해도 올해의 RBR+베르스타펜 조합은 빠르고(기록지에서 보시다시피 p1 +0.007), 믹 슈마허가 하스 차를 타고 Q2 진출에 성공하다니 과연 빗길은 빗길인데, 이미 맨 뒷자리 출발이 확정된 페라리의 사인스가 맥라렌의 다니엘 리카도를 끝끝내 밀어내는 일이 벌어졌지요. 트랙에 나온 타이밍 자체는 나쁘잖아 보였는데 랩타임이 너무 안 나오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꾹꾹 밟을 줄이야. Q2 문 닫고 올라간 드라이버는 아스톤 마틴의 제바스티안 베텔. 

Q2 때도 시작부터 그립 놓쳐 미끄러지거나 타이어 온도 못 잡는 드라이버들이 속출했습니다. 페라리의 르클레르는 마지막 코너 실수가 없었다면 더 좋은 기록이 나올 뻔도 했지요. 윌리엄스의 러셀도 거의 비슷한 실수를 하는 바람에 Q3 진출에 실패(윌리엄스가 Q3 진출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모습, 체감상으론 2014시즌 이후 처음). 아스톤 마틴은 p9, p11로 다소 아쉬웠고 맥라렌에서는 란도 노리스가 그래도 p10 턱걸이에 성공합니다. Q3 진출 커트라인은 p1 +1.560초. 막판에 르클레르 기록을 위해 아웃랩만 돌러 나왔던 사인스의 팀 플레이도 흥미로웠습니다. 페라리도 필요할 때는 어떻게든 하는 팀이지요. 가슬리의 Q2 최고기록이 베르스타펜 최고기록 +0.085초라는 점도 짚어 볼 만 합니다. 

날씨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보니 끝까지 열심히 도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리어윙 가장자리 와류가 중계 화면에서도 보일 정도. 어쩌다 보니 트랙 포지션상 Q3 첫 플라잉 랩은 메르세데스의 해밀튼부터, RBR의 베르스타펜이 제일 마지막에 기록을 내게 되었어요. 해밀튼 바로 뒤가 팀메이트인 발테리 보타스. 슬립스트림 영향 있을 만큼의 거리는 아니어 보였으나 보타스가 더 빨랐습니다. 확실히 애매한 상황 속 적응력이 대단한 드라이버라고 생각해요. 첫 시도에서 해밀튼 1분 23초 093, 보타스 1분 23초 071, 베르스타펜 1분 23초 298, 페레스 1분 23초 733. 체커드 플랙까지 5분쯤을 남기고 해밀튼부터 다시 트랙으로 나왔습니다. 정말로 최고 기록을 내 와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일까요. 메르세데스에서 트랙에 혼자 있을 때 좋은 기록 찍고 - 혹시 모르니까 한 랩 웜업한 다음 추가 시도를 해 볼 만한 시간 남겨두고 내보낸 것 같다는 짐작을. 결과적으로 메르세데스 드라이버들이 그 시점에서 가능한 최선의 기록을 목표로 한 셈이고 성공했습니다. 이들만 1분 22초대 기록을 낸 것도 흥미롭지요. Q3 기록상으로는 해밀튼 p1, 보타스 p2지만 해밀튼에게 그리드 페널티가 있는 만큼 폴 포지션에서는 보타스가 스타트. p3의 베르스타펜이 첫줄 스타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레이스를 앞두고, 맥라렌에서는 리카도 차의 파워유닛을 싹 교체하기로 결정합니다. 그간 부품 아껴 쓴 보람이 있어서인지, 퀄리파잉 성적이 별로였던 것도 있지만 여차저차 5그리드 페널티로 새것을 얹은 셈. 레이스 전부터 날씨는 꾸물꾸물했고 덕택에 웻 컨디션 선언, 모두 인터미디엇 타이어로 레이스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미디엇 날씨라기엔 트랙이 많이 젖어 있는 것 같았지만요. 스타팅 그리드에서 메르세데스의 레이스 엔지니어 피터 "보노" 보닝턴과 해밀튼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대화가 팀라디오로 오가기도. 

 

보타스가 어째 포메이션 랩을 굉장히 빠르게 리드한 느낌이었지요, 최후미의 리카도가 아직 턴8 지나는 중에 보타스는 이미 마지막 코너를 지나고 있었을 정도. L1/58 스타트, 알핀의 페르난도 알론소페널티 자체 수행(?)을 한 것 빼고는 비교적 큰 문제 없이 생각보다 무난한 스타트였습니다. RBR 입장에선 아쉬웠겠어요. 알론소는 전날 퀄리파잉 세션 중 더블 옐로 플랙 상황에서 속력 늦추지 않은 문제로 스튜어드에 불려갔지만 어째서인지 추가 조치 없음 결정이 나왔었는데(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다른 드라이버들은 대체로 그리드 페널티와 벌점을 받았던 것과 다르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야기저기서 스핀하는 드라이버들이 나와 옐로 플랙 깜빡깜빡했던 걸 보면 노면이 미끄럽긴 한 모양. L4/58 메르세데스의 보타스가 RBR의 베르스타펜 상대로 이미 1.8초 이상을 앞선 가운데 해밀튼은 p11에서 p9까지. 빗길이라 DRS고 뭐고 없는 상황에서 의외로 알파타우리의 츠노다 유키가 해밀튼 방어(?)에 한 몫을 합니다. L8/58에서 해밀튼 p8, 그런데 L11/58 상황에선 p6이었으니 초반 해밀튼 페이스가 무섭긴 했어요. 페라리의 르클레르는 RBR의 베르스타펜 약 2초 뒤에서 꾸준히 달리고 있던 가운데 레이스 리더 보타스와 베르스타펜 사이가 3초 넘게 벌어진 상황. 이쯤 되면 메르세데스가 빠른가 RBR에서 페이스 조정 중인가 둘 다인가 생각해 보게 되지요. 길은 여전히 미끄러웠고, L20/58 보타스가 턴1에서 살짝 실수가 있었는데도 2.5초 이상 리드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좋은 페이스를 이어 갔습니다.

 

인터미디엇 타이어를 슬릭처럼 갈아 쓰는 드라이버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 타이어 눈치 싸움 하기에도 애매한 날씨, L35/58 RBR의 페레스 - 메르세데스 해밀튼의 흥미로운 휠투휠 외엔 이렇다할 배틀 없이 레이스가 이어졌어요. L36/58 아스톤 마틴의 베텔이 미디움 타이어를 시도합니다만 곧바로 포기하고 다시 피트인해 인터미디엇으로 교체합니다. 이 도박으로 잃은 게 컸지요. 메르세데스에서는 보타스 쪽 먼저 새 인터미디엇으로 교체, 피트인하라는 팀라디오가 나왔지만 해밀튼은 버티기에 들어갔습니다만 여기서부터 레이스 흐름이 (해밀튼 입장에서는) 까다로워졌습니다. 핏스톱 타이밍 잡기가 정말 애매했거든요. 묵은 인터미디엇으로도 어떻게든 페이스를 뽑아 낸 건 대단했지만, 초반에 워낙 무시무시하게 달렸었으니 완주가 가능할까 불안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막판 슬릭 난장판이 벌어질까 싶었던 것도 있고. 결국 L50/58 해밀튼 핏, 새 인터미디엇으로 교체하고 순위를 몇 칸 잃습니다. p11 스타트에서 p5라면 나쁘잖은 결과인데 그게 해밀튼이다 보니 다들 기대치가 달랐던 셈인가 싶기도 해요. 체커드 플랙, 보타스 우승, 마지막 랩 올 섹터 패스티스트로 마무리. 포디움은 보타스, 베르스타펜, 페레스. 르클레르 p4, 해밀튼 p5. 알핀의 에스테반 오콘이 0스톱으로 포인트피니시에 성공합니다(p10 턱걸이지만). 

해밀튼의 버티기 + 핏스톱 이후 페이스가 영 안 나온 것, 아쉽긴 해도 타이어 펑처나 DNF같은 사태로 이어지지 않은 걸 고려하면 메르세데스 입장에선 p1 p5 결과도 다행인 셈입니다. 체커드 플랙 받기 전까진 정말 별 일 다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메르세데스 사람들은 이 상황에 실버스톤 2020 때같은 일은 정말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거고. 레이스 종료 후 알핀의 오콘 차 오른쪽 앞바퀴 상태만 해도 아슬아슬했거든요. 베텔의 슬릭 도박이 실패한 것, 해밀튼의 버티기가 가져온 결과 같은 걸 보면서 신뢰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레이스이기도 했습니다. 후자의 경우 막판에 팀라디오로 짜증을 내긴 했지만 그 전까지 드라이버와 레이스엔지니어(+메르세데스 피트월)이 최대한 서로의 판단을 존중해 주려는 것 같았거든요. 보타스도 이런저런 일 있었지만 - 특히나 이번 시즌에 - 그래도 믿고 간 만큼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어쨌거나 오랜만에 레드 플랙도 세이프티 카도 없이 마무리된 레이스- 라는 느낌이네요, 그 점에선 참 다행이지요. 

 

보타스의 우승과 패스티스트 랩 기록에 힘입어 메르세데스는 RBR 더블 포디움에도 컨스트럭터스 챔피언십 리드를 이어 갑니다. 맥라렌하고 페라리는 영혼의 쌍둥이라도 되는지, 맥라렌이 영 페이스 안 나온 이번 GP에서 페라리는 핏스톱 8.1초로 응답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덕택에(???) 컨스트럭터스 챔피언십 3위 다툼은 근소한 차이로 맥라렌 리드. 

 

드라이버스 챔피언십 쪽은 리드가 다시 뒤집혔네요. 이번에는 RBR의 베르스타펜이 6포인트 차로 리드. 남은 그랑프리는 이제 여섯, 이대로라면 드라이버스 챔피언십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경쟁이 이어질 분위깁니다. 시즌 초반은 물론이고 비교적 최근까지 확실한 우위에 있던 RBR 이번 시즌 차가 이스탄불 파크에서는 어째 전만 못하단 느낌이 들었어요. 일시적 현상인지 실버스톤 때 외엔 메이저 업데이트 없다시피했다는 메르세데스가 뭔가를 해냈는지는 한두 그랑프리 정도는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여섯 그랑프리 남았는데 이런 이야기 하는 것도 조금 어폐가 있지만서도). 베르스타펜을 올해 메르세데스 차에 태우면 같은 결과가 나올지 의문이지만, 해밀튼을 지금 RBR 차에 태우면 매 GP 우승할 것 같았던 것도 있고. 저의 궁금증 해결을 위해서라도 챔피언십 빨리 마무리하고 두 드라이버 한 번 바꾸어 운전하는 이벤트라도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트윗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차 바꾸어 태워 보고 싶은 다른 조합은 베르스타펜-르클레르. 더 궁금한 건 전자보다 이쪽.  

 

그나저나, 이제 한국 거주자 입장에선 손꼽히게 지옥같은 일정이 남았습니다: 미국, 멕시코, 브라질. 이걸 넘기면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부다비로 올 시즌도 끝이네요. 별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개막전이 한참 전 일 같네요. 이제 남은 그랑프리들에선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국GP 잡담으로 이어 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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