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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그랑프리 잡담/season 2020

2020-11-15 / Round 14: 터키 그랑프리 -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면

by p 2020. 11. 29.

조금 늦은 터키 GP 잡담입니다. 이몰라만큼은 아니어도, 오랜만에 찾는 이스탄불이지요. 드라이버스 챔피언십 1위 결정 여부를 놓고 이런저런 예측이 넘쳤는데, 거의 매 해 시즌 끝물에 이런 걸 보긴 합니다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아부다비 2010이나 이런저런 브라질 GP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더더욱요). 이스탄불 파크는 한동안 이렇다할 큰 이벤트가 열리지 않았던 서킷이어서인지 F1을 앞두고 트랙을 새로 포장했다는데, 그것이 선선하다 못해 우천까지 치달은 날씨와 피렐리의 단단한 타이어 선택이 맞물려 2010년 영암같은 상황을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아마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주말이기도 했습니다. 아, 귀여운 자선 캠페인도 있었군요. 매년 이 맘 때쯤이면 맥라렌에서 BBC "Children in Need" 캠페인에 참여하고는 하는데 그 여파(?)로 Pudsey가 개러지에 등장했습니다. 최고의 손님. :)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록지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FP2 타이어 선택 여부가 나와 있지 않은 건 2021년 사양의 타이어들을 테스트했기 때문인데요. 평시라면 트랙 온도 30도 이상을 기록했어야 할 상황에 겨우 20도대를 간신히 찍을 정도로 선선했던 날씨, 그리고 포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름기가 올라온 트랙 상태 덕택에 - 이건 토, 일요일에 비가 오는 바람에 한층 더 심해졌습니다 - 다들 고생하는 모양이었어요. 그래선지 기록도 생각만큼은 나오지 않았고요. FP1 상위권 기록이 1분 35초대 초반, FP2에선 28초대 초반이었습니다. 올해 열리기 전 가장 최근에 열린 2011시즌 터키 GP의 퀄리파잉 폴 포지션 기록이 1분 25초 049(베텔, RBR), 레이스 패스티스트 랩은 1분 29초 703(웨버, RBR)였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그립 잡기가 난해했구나 싶지요. 

 

 

토요일, 예보대로 비가 내렸고 그래서 연습주행 세번째 세션에는 시작부터 인터미디엇, 곧이어 풀 웻 타이어들이 등장했습니다. 트랙 상태가 나빠서인지 다들 퀄리파잉 세션을 위해 최소한의 트랙 상태 체크만 하는 수준으로 소화한 랩 수가 적었고, 메르세데스에서도 보타스는 기록 확인만 하는 정도, 해밀튼은 아예 플라잉 랩을 소화하지 않아 기록이 없을 정도로 조용히 세션을 넘겼습니다. 다소 의외이기도 했는데요. 올 시즌 웻 컨디션에서 치르는 퀄리파잉은 제 기억으로는 스티리아에 이어 두번째인데, 트랙은 그보다 훨씬 더 미끄러울 것이어서 그 정도 체크만으로 괜찮을지... 싶었단 말이지요. 여하간에 이번에도 기록지 맨 윗자리에는 RBR의 막스 베르스타펜. 웻 컨디션에서 꾸준히 강세를 보이는 드라이버이기도 합니다. 

 

 

퀄리파잉 세션에서도 내내 웻 컨디션. 2분대 랩타임으로도 Q1에서 p1을 다툴 수 있다니 과연 비 오는 날답지요. 인터미디엇과 풀 웻이 그래도 좀 섞여 있다가, 8분 30초쯤을 남기고부터는 모두모두 풀 웻. 그리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인지 6분 56초를 남기고 레드 플랙 선언. 비가 더 많이 내려 도저히 세션 재개가 어렵다 싶으면 그대로 스타팅 그리드가 결정될 가능성도 0은 아니었으나... 글쎄요 과연. 노면이 심하게 미끄럽긴 했는지 옐로 플랙이 깜빡이는 가운데, 해밀튼이 Q1을 p14로 통과하는(!) 의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Q2 시작이었는데요, 윌리엄스의 라티피가 차를 해먹는 바람에 그걸 치우기 위한 중장비들이 아직 다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 그린 라이트 선언이 되는 바람에 그 부근을 다른 차들이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2014시즌 일본 GP 당시 쥘 비앙키 사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레이스 디렉터 판단을 지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린 선언을 했었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 해도 사고를 겪었던 이상 그 이후로는 실제 운영에 반영을 했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Q2에서도 RBR은 빠르고, 페라리는 느리고, 메르세데스는 영 모르겠는 가운데, 쭉 돌리다 보니 브라질 넛처럼 리더보드 위로 떠오르는 이름들은 맨 고만고만한 ... 그런 상황. Q3 재미있었습니다. 풀 웻과 인터미디엇을 오간 가운데 막판 스퍼트에 대 성공한 레이싱 포인트의 랜스 스트롤이 커리어 첫 폴 포지션 기록! 2020시즌 모든 GP 폴 포지션 획득이라는 메르세데스의 대 기록(?)이 깨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레이싱 포인트의 전략도 전략인데, 스트롤은 어째 최근에 영 성적이 좋지 못했던 드라이버였던 만큼 폴 따고 더 기뻤을 것 같아요. 퀄리파잉 top 3 = 스트롤, 베르스타펜, 페레스라는 매우 흥미로운 결과로 토요일을 마무리합니다. 

 

윌리엄스 드라이버들은 파워 유닛 교체로 맨 뒤 출발(+러셀의 경우 옐로 플랙 위반으로 5그리드 페널티 추가), 맥라렌의 경우 까를로스 사인스가 다른 드라이버(페레스) 방해로 3그리드 페널티, 란도 노리스가 옐로 플랙 위반으로 5그리드 페널티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top 10에서 그리드 페널티는 없었네요. 최종 스타팅 그리드는 이렇게: 

 

일요일에도 레이스 시작 전부터 트랙에 비가 오고 노면이 미끄럽긴 했던 모양으로, 윌리엄스의 조지 러셀이 그리드로 출근하는 도중에 프론트 윙을 해먹는다거나 하는 소소하지만은 않은 사건사고들이 있었어요(결국 윌리엄스 두 드라이버들은 피트레인 스타트 결정). 첫 랩 첫 코너를 몇 대나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지 걱정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섹터 2 가기 전에 옐로가 뜬대도 놀라지 않을 준비를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L1/58 코너 셋 지나가기도 전에 옐로 플랙. 다행히 금방 해제되었습니다만은. 평소의 0.7~0.8배속으로 보는 듯한 스타트였습니다. 아랫시리즈 경기 보는 듯한 빠르기... 그런데 정말 그립 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페라리의 베텔이 과연 4회 챔피언이다 싶은 주행을 보여 주었어요. 해밀튼은 아무래도 안전빵 주행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보니까(=챔피언십 확정 전), 초반에는 아무래도 위험 부담보다는 몸을 좀 사리는 느낌이었어요. 

 

페라리의 르클레르가 풀 웻으로 스타트한 드라이버들 중에선 가장 먼저 핏, L7/58 인터미디엇을 시도합니다. 이게 성공적이라 보았는지 줄줄이 핏스톱 시작, 보타스는 르클레르 뒤로 나왔고 예상대로 인터미디엇. L9/58에서 해밀튼과 베텔이 모두 핏스톱을 가져가고, 두 집 다 2.8초를 찍으며 먼저 들어간 베텔이 앞서 나오게 되었었네요. 그러나 두 드라이버 랩타임 차이가 거의 4초였다는 황당한 상황 속에... 핏스톱 빠르게 잘 하기로 유명한 RBR에서도 4초대 핏스톱이 나오고 맙니다(L12/58 베르스타펜, 이어서 L13/58 알본은 2.9로 준수한 편이었으나 RBR치고는 그다지죠). L14/58에서 잠시 VSC가 뜨면서 베텔이 해밀튼을 상대로 우위를 가져가는 가운데 보타스가 여러 차례 스핀 ... 아마도 올해 터키 GP에서 몹시 고생한 드라이버들 중 한 명이 아닐까 합니다. 베텔하고 해밀튼 같은 경우엔 서로의 스타일을 알 만큼 알아서, 해밀튼이 추월을 노리는 순간들을 그만큼 베텔이 잘 막아낸 것 같았고요. 

 

이쯤 되면 슬릭 나올 만 하지 않아? 한 상황에도 드라이버와 팀은 웻 선택을 이어갔습니다. L30/58즈음에서 저는 누군가 슬릭 도박을 걸 것 같다 생각했는데, L31/58 두 번째 핏스톱을 가져간 르클레르는 다시 인터미디엇을 택하더라고요. L35/58 피트로 불러들이지 말라는 해밀튼의 팀라디오가 짤막하게 나왔고("Don't box me man") 이어진 질주, L37/58 어느샌가 해밀튼이 레이스 리더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두 랩만에 인터벌 4초를 벌어 냅니다. 정작 폴 시터였던 스트롤은 L43/58 사인스에게도 추월당하고, 두번째 핏스톱 이후 급격하게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요. L55/58 해밀튼은 거의 공짜 핏스톱을 가져가도 될 만큼의 격차를 벌었지만, 그래도 들어가지 않는(!) 광기에 가까운 타이어 사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르클레르가 2위를 하나 싶었는데..... 레이스는 체커드 플랙 받을 때까지죠. 르클레르가 삐끗한 사이 페레스 2위, 베텔이 3위를 기록합니다. 르클레르는 4위로 마무리. 패스티스트 랩은 맥라렌의 노리스가 가져갑니다. 

 

광기의 타이어 사용 기록... 인터미디엇을 갈아 슬릭으로 만들어 쓴 줄;

 

해밀튼이 저렇게 이모셔널한 면을 트랙사이드에서 드러내는 건 정말 드물게 보는 느낌인데, 그럴 만한 날이긴 했습니다. 저런 드라이버를 어쩌다보니 커리어 초반부터 쭉 보고 있는데 해가 갈수록 나아지는 게 보여서 더 흥미롭기도 하고요 ... 이게 되네요. 7회째 드라이버 챔피언십 1위 확정. 

 

한편, 컨스트럭터스 챔피언십 3위 경쟁의 경우 이쪽 결과는 야스 마리나에서 체커드 플랙 받을 때까지(=최종전인 아부다비 GP 끝날 때까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페레스가 포디움에 가면서 레이싱 포인트가 다소 우세해졌지만, 포인트 격차가 크지 않아서 남은 세 GP 동안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상황이거든요. 자그마치 네 팀이 3위를 놓고 다투는 모양새라니 이게 1위 경쟁이었어야 했는데. 3위 경쟁도 경쟁인데 남은 세 그랑프리에서 윌리엄스가 꼭 포인트피니시 했으면 좋겠습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 컨챔 3위 확정을 위해서는 맥라렌 드라이버들이 포디움을 좀 올라가야만 .... 

 

그래도 역시,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가능해지는 어떤 순간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우승 축하해요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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